북한 김일성 모든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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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북한 김일성 모든 정보

by 이응지읒지옷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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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 알아볼건데요.

대한민국의 말로는 최초의 대통령이죠. 

북한 말로는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 수령, 최고 지도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정말 한참을 찾아보고 여러자료들을 모으고 사진도 몇장 올려 보았습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과 수령 지도 체제를 바탕으로 1인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북한의 1인 독재 체제에서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김일성.

김일성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

일본군의 추격이 시작되자 소련으로 가서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김일성은 1912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926년에

만주로 건너가 육문 중학교에 입학한 뒤 공산 청년 동맹에 들어가 활동했다.

 

1931년에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에는 조선인 항일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36년에는 조국 광복회를 만들었고, 1937년에는 국내의 조직과 손을 잡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의 일본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 등을 공격해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기도 했고 합니다.

 

이후 김일성은 두만강 근처의 국경 지대에서 유격 활동을 벌이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갔다.

소련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8 · 15 광복 때 자신의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원산으로 들어왔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김일성이란 인물은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진짜 이름은 김성주 입니다. 김일성이란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김성주이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였는가가 정말 궁금합니다.

항일 무장투쟁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 대표적인 예로 보천보 습격사건이 있는데요

규모는 작았지만 ​ 1932년 일제의 본격 만주 침략 이후 이미 소멸한 줄 알았던 ​ 만주의

항일독립운동 세력이 살아있다는걸 조선인들에게 알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성주는 보천보 전투를 통해 독립전쟁을 펼쳤으니 독립운동가가 맞다?

맞네요 여기 사진이 있네요 ㅋㅋ.... 독립운동 한거 맞네요. 사진이 있으니 ㅎㅎㅎ

저 이러다가 큰일나는거 아니에요..?...

 

김일성이 내세운 독립운동은 보천보전투인데 김좌진장군의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전투에

비해 별볼일 없는 전투입니다 당시 만주일대에서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에서 독립운동한는

유명한 장군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나 일제가 패망한후 소련군88여단과 같이 들어온

김일성은 너무 젊다고 그를 보려 모여든 평양군중들은 가짜라고 웅성 대곤 했지요 사실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동한 독립군 김일성을 본사람은 나이가 많은 분으로 알고있는데 25세의 젊은이가

독립운동했다고 하며 소련군지휘아래 북한을 장악하고 공산화시키면서 인민들을 강압통치하는것은

보천보전투를 내세워 독립운동이 자기가 평생머물자리를 만들기위해 한것이 아니냐며 비웃거리는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엄청난 말들이 많이 있네요 그래서 엄청 찾아보고 여러한 한국사 그리고 증언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던 그 김일성임이 밝혀졌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김일성의 가짜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는 평지에서 싸우는 정규군이 아니라 산악지대를 숨어다니는 게릴라 부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병력을 부풀린다던가 신출귀몰함을 선전해야만 했다.

 

또한 김일성은 일본이 거액의 상금을 걸어놓고도 잡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였다.

따라서 못잡은 것의 변명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측에서도 김일성을 과대포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면서 김일성은 확대되어 왔으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젊은이 김일성은 가짜로 오인받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분단된 현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구실삼아 가짜 김일성론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로 씌여져야 한다.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버리거나 축소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위대한 김일성은 없었다고해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이 가짜인 것도 아니다.

애초에 백마를 타고 흰수염을 휘날리며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미련한 기대가 북한의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어 버렸다. 1930년대 후반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단체는 김일성 등이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이 유일하였다.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김일성 부대에 현혹되지도 말아야 겠지만 만주에서의 독립투쟁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족해방운동사 1937년 동북항일연군에 속한

김일성의 부대가 함남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한 전투로 일제의 군사시설, 경찰, 통신기관을 파괴하고

다수의 군수품을 탈취한 사건. 이러한 내용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김일성의 부대가 유명해 졌다고 한다.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주장 역시 의견이 분분하다.

오영진, 미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 한국사>

 

이명영, 김일성열전 내용요약: 함남 국경지대 압록강 일대에 할거하고 있는 이른바 김일성일파로

칭하는 무장단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 위민생(중국인 위증민)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조선인과 중국인 혼합의 무장단이며 김일성의 신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당 29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 실부모를

따라 간도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이 되어 무장단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이종석, 현대북한의 이해<역사비평사>에서 발췌 애초에 항일무장투쟁기의 만주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김일성이 존재할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종석,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457p 김일성-이후락 평양밀담 전문

<월간중앙> 1989년 3월호 박사월, 김형욱, <김형욱 회고록 2> [문화광장] 1987년 262-263p

김학규(1900~1967) : 독립운동가.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였으며 1931년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참모를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중농의 민족주의자로 북한이

그의 항일운동을 엄청나게 과대포장한 것이 문제기는 하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반일운동으로

복역한 기록이 일제자료에 나와있다.

양세봉(1896~1934): 독립운동가. 1919년부터 철산등지에서 무장독립투쟁에 투신하여 1920년

광복군 총영, 1923년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삼부통합과정에서 국민부에 가담하여 국민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당 군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홍경성전투, 노구대전투, 쾌대모자전투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1934년 일본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마적 두목 이동양 등 주구세력에게 살해당하였다.

 

김학규, 백파자서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2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598p

신주백,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바로잡아야할 우리역사 37장면]2권 <역사비평사> 217~218p

인용 장세윤,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 中 이청천과 양세봉에서 <역사비평사> 173p 이상조(1913~ )

공산주의운동가. 조선의용대 제1지대 정치지도원을 지냈으며 김두봉, 최창익의 화북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조선의용군 제3지대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중 박헌영을 수행하여 북경을 방문하였다.

1953년 휴전회담 북한측 수석대표를 역임하였다. 1956년 소련 주재 북한대사를 지내던 중 8월 종파사건과

관련되어 숙청되자 귀국하지 않고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1989년 9월 남한을 방문하였다.

 

음.. 대체 무엇이 진실일까요.. 계속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거짓조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실제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연구하다

3년전 타계한 이명영 교수(전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

(1974년 출간, 신문화사)을 통해 북한의 조작사실을 밝혔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

(金聖柱)이고,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하여 김성주가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87)씨는

“연설에 앞서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77)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치차코프는

여기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역설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70·현 고대 북한학과) 전임강사다.

 

재일동포로 조총련의 일본내 조선대학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가르친 바 있다.

허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일본 육사출신의 보천보 항일투쟁의 주역 김일성 장군, 본명은 김광서

(함경남도 북천군태생 1887 ~1937년 11월 전사) . 위와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항일투쟁 선전이 조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보천보전투와

관련 “논란이 많은 내용인 만큼 앞으로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교육부의 직권 수정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이러한 내용들이 있네요. 무엇이 진실인지요..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맞습니다???..

김일성은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안투 현에서 항일유격대를 구성해

무장활동에 참여했으며, 1933년 각지의 항일유격대들이 통합해서 구성된 동북인민혁명군의 제3단

정치위원이 되었습니다. ​

 

김일성이란 인물은 독립운동가가 맞습니다. 하지만 김성주가 김정일이 맞냐..

결론은 김일성은 국가원수로 태어난 게 아니라 일제강점 시대에 태어나 해방을 꿈꿨고

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고,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컸습니다.

완벽한 정리 내용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고,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의 붉은군대를 따라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평양에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다. 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실제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은 만주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도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일반 대중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의 전공(戰功)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 후부터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처럼 날조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북한으로 입성한 직후인 8월 26일부터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개시하였다.

첫 번째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공산당의 혁명전술로써 처음에는 민족진영의 인사와 공산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진영 인사의 수를 늘려 결국 공산진영 독점체제를 만들어 북한의 관리와 조직을 구성해나갔다.

두 번째로,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을 조직하였다(1945. 10 .10). 처음에는 북한만의 지역성을 감안하여

북조선노동당(北朝鮮勞動黨)이라고 하였으나, 1949년 6월부터 남북의 세력을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조선노동당으로 개칭하였다. 세 번째로, 1946년 2월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일성이 인민위원장이 되어 공산정부 수립 전까지 전권을 행사하였다.

네 번째로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한의 국회의원과 같음)을 선출하여

인민공화국 헌법을 공표하였고(9월 2일), 곧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48. 9. 9). 김일성은 북한으로 들어와 1당 독재·1인 독재·1족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소련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권 구축을 위해 더욱 숙청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 민족주의자(조만식 曺晩植)

국내파 공산주의자(현준혁 玄俊赫, 박헌영 朴憲永), 중국출신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이

옌안[延安]으로 퇴각하여 세력을 키울 때, 그와 연계하여 성장한 한국계 공산주의자)(윤공흠 尹公欽 등)와

소련계(허가이 許哥而)를 차례로 제거하였다.

 

특히 합작하여 활용한 다음 위험스럽게 생각되면 측근까지도 제거해버렸다.

김일성의 북한 통치는 다음의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제1단계는 1945 ~ 1950년대의 폭력혁명기이다.

김일성은 국내로 들어와 기반을 다지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경쟁세력을 숙청하고

남한까지 공산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6·25 전쟁을 도발하였다. 제2단계는 1960년대로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기본 역사관인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충실한 시기이다.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에 몰입하여 강력한 공산혁명을 추진하였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으로 무장하여,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인민들을 교육하였다. 제3단계는 1970년대 이후의 시기로

공산권 내부의 변화 및 국제관계의 변화로 북한이 자주노선을 취한 시기이다.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이 단절되거나 소련 내부의 공산주의 평가 분위기 변화 그리고 중국에서의

문화혁명과 그 후의 평화 외교 등이 원인이 되어 독자노선을 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체사상

(主體思想)이라는 새로운 독자적 이념을 강조하여, 김일성 사상으로 무장한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공산주의를 강화하였다. 김일성은 1족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김정일(金正日)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부자 간의 갈등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7월 묘향산으로 휴양을 갔다가 동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군에 있던건 사실이네요. 하지만 독립운동의 사진은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딥웹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는데요 없어요.

증거가 없습니다. 저 이러다가 김정은한테 혼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번에 보니까 아버지 기일때 엄청 울던데 가족사랑이 넘치는 인물이죠.

 

내가 왜 김일성에 대해 이렇게 알아보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엄청 찾아 보았구요 여러 자료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솔직히 일제강점기 시절엔 모두다 독립운동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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